'장애인고용, ‘함께’에서 ‘하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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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문장복 댓글 0건 조회 12,483회 작성일 13-04-16 17:21본문
고용노동부와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은 최근 '2013 장애인고용 인식개선 작품현상공모전' 입상작을 발표했다.
앞서 공단은 장애인고용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 장애인고용촉진 강조기간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해 매년 전 국민을 대상으로 에세이, 사진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공모를 실시해왔다.
올해로 22회를 맞은 작품현상공모전의 주제는 ‘장애인고용’으로 에세이, 인쇄매체디자인, 사진, 환경 및 실내디자인 등 네 분야 입상작 총 27점이 결정됐다. 본지는 환경 및 실내디자인을 제외한 입상작을 분야별로 소개할 예정이다. 여섯번째는 에세이 분야 장려 작품.
장애인고용, ‘함께’에서 ‘하나’로
송영희(남, 42세, 서울 서대문)
“경(卿)은 들으라!” 임금이 신하를 보고 말한다.
신하는 황급히 임금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지를 살피어 “네, 전하!”라고 화답한다. 이번에는 임금이 다른 신하를 보며 부른다.
“경(卿은 들으라!” 하지만 이번엔 아무 신하도 대답을 않는다.
임금의 부름에 계속해서 아무 대답이 없자 신하들은 임금의 용안을 살피며 안절부절 하기 시작한다. 임금은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신하들을 응시하다 이내 무언가를 알아차렸다는 듯 다시금 환한 표정으로 한 신하를 바라보며 부른다.
“소경(小卿)은 들으라!” 그러자 그제서야 한 신하가 선명한 목소리로 “네, 전하!”라고 대답한다.
시각장애인을 칭하는 말 중 '소경(小卿)‘이란 말은 조선시대에 한 임금이 신하를 부를 때 “경(卿)은..”이라고 부르면 신하 중 눈이 먼 신하가 자신을 부를는지 알지 못해 임금이 친히 구분하여 ‘소경’이라고 부르는 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시각장애인을 칭하는 호칭 중 봉사(奉仕), 참봉(參奉), 등도 조선시대 각각 종8품과 종9품에 해당하는 관직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과거 우리가 장애인을 칭하는 호칭들을 살펴보면 당시 장애인의 사회적 지위를 칭하거나 장애인 당사자에 대한 이해와 배려에서 기인한 것들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장애인을 칭하는 호칭 중에는 ‘장애인’ ‘장애자’ ‘장애우’ 등 여러 호칭들이 혼용되고 있으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하여 부르는 호칭 또한 ‘장애인과 비장애인’, ‘장애인과 일반인’과 ‘장애인과 정상인’ 등등이 같이 쓰여지고 있어 당사자는 물론 이를 사용하는 사람들마저 혼란스러워 아예 말을 얼버무리거나 심지어는 사용을 꺼리는 경우까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맞는 말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필자는 그 모두가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다. 아니 그 호칭을 두고 무엇이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논쟁이라는 판단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안에 어떠한 감정과 의미를 담아 사용하고 또 받아들이고 있느냐는 것이며, 그것은 어떠한 호칭을 사용한다 하더라 도 우리 사회의 다양한 사회적 배경과 그 개개인의 감정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사랑이란 단어 한 마디에도 아가페(agape), 스토르게(storge), 에로스(eros), 플라토닉(platonic), 필레오(filevw),루두스(rudis) 등 다양한 의미들이 함의되어 있고 또 우리는 그 ‘사랑’이란 단어 안에 각자가 가진 스스로의 감정을 담아 사용하며 또한 그것을 듣는 이 또한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어떠한 감정으로 말했는지를 이해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우리말에는 존칭이나 존댓말이 따로 있고 또 오랜 시간 그러한 언어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특히나 사람을 칭하는 호칭에 예민하며 자신의 감정을 전하는 데에 신중을 기하는 습관이 있다. 그러나 그 내면에 담긴 정서나 감정은 잠시의 예(禮)는 갖출 수 있을지언정 어떠한 단어나 표현으로도 감출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서두가 너무 길었는지 모르겠으나 이러한 사소한 호칭에서의 혼선과 어색함이, 또 장애인을 바라보는 잘못 내재화된 선입견이 아직까지도 장애인과 비장애인 간 아주 멀지도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어중간한 거리를 계속해서 형성하여 더 이상 다가서지 못하도록 하는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혹자는 이러한 거리감 따윈 별 거 아니라 치부해버릴 수도 있겠으나 이런 사소한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의 어색함이 서로를 대하는 불편함으로, 또 그러한 불편함이 감정적으로 고착되어 나중에는 아예 회피해버리는 상황에까지도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누군가를 만나고 안 만나고의 문제를 넘어 장애인들의 사회화 과정에서 고용, 참여, 기회 등 여러 방면에서 그로 인한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하게 되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장애인 수는 선천적 이유나 후천적 질병 그리고 산업재해 및 고령화에 따른 노인 인구 증가 등으로 날로 늘어나고 있으며 그에 따른 사회문제가 종종 심각한 화두로 이슈화 되고 있는 상황에서 ‘장애인 고용’은 그야 말로 장애인 당사자의 삶의 질은 물론 사회적 자원의 효율성 재고라는 측면에서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가장 이상적 해법임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장애인 고용을 더욱 적극적으로 창출하고 개발해나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바로 이러한 질문에서 필자는 우리가 다시 원론적인 고민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장애인 고용을 활성화 하기 위해 사용자는 물론 장애인 당사자에 대한 다양하고 지속적인 지원정책도 분명 꼭 필요하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그에 앞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장애인과 비장애인 간 어색하고 불필요한 소통의 장벽을 허물기 위한 노력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생각보다 그리 거창하지도 복잡하지도 않은 일이며 지금까지의 여러 교육이나 현장에서의 활동들을 통해 이미 해오던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노력들이 지속되지 않거나 일회적 행사로 그 진정성 없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지금이라도 그러한 형식적 틀을 벗어나 사회 환경적 변화에 따른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할 것이다.
장애인의 문제가 단순히 ‘복지’라는 관점에서 벗어나 ‘고용’이라는 생산적 관점으로 변화되었음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나 또한 아주 도전적인 변화이기도 하다.
이러한 변화를 보다 능동적으로 받아들이고 또 우리 사회에 잘 안착시키기 위해서는 장애인 당사자는 물론 이를 지켜보는 사회 전체적 시각의 변화가 절실히 필요하다.
하지만 장애인의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차는 아직까지도 너무도 뚜렷하다. 이러한 관점은 어느 일방이 앞서 가서도 또 과거에 머물러 있어도 전체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에 큰 걸림돌이 된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장애인의 고용 및 인식 문제를 바라보는 네 가지의 관점이 존재한다. 그 중 두 가지는 장애인 당사자의 시각으로 복지라는 영역에서 안주하며 국가의 책임을 강조하는 시각과 이제는 제도적 인큐베이터에서 벗어나 스스로 당당해지고자 하는 시각이다.
그리고 나머지 두 가지는 이러한 장애인 문제를 바라보는 일반 사회적 시각으로 장애인의 고용 및 사회 참여를 그들이 가진 생산적 요소를 발굴하고 또 함께 하고자 하는 진정한 동반자적 시각이며, 마지막 하나는 장애인들의 그 모든 사회 활동에 대해 실리보다는 형식적 명분을 더욱 중시하는 시각 또한 존재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각기 다른 입장에 서서 우리는 하나의 대상, 즉 장애인에 대하여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거나 혹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더라도 조금은 다른 의미들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장애인의 사회화 과정에서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과제는 그러한 각기 다른 관점을 통합하고 비록 시간이 더디더라도 서로 간 특별한 이벤트를 통해서가 아닌 일상에서의 자연스러운 만남의 기회가 보다 많이 주어져야 할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장애인의 사회 참여와 고용 창출은 해를 거듭하며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고 적어도 그것의 필요를 논하는 데에는 아무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또한 그간의 여러 제도적 노력과 사회 전반적인 의식의 성장을 통해 장애인 고용률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으나 그것의 이면에 감추어진 높은 이직률을 보면 그간의 성장을 자랑하기엔 아직 이르다는 생각이다.
고용 현장과 일반적 사회현상은 차치하고, 장애인 근로자의 높은 이직률은 앞서 언급한 바 대로 서로 간 관점의 차이에 따른 사회 현장에서의 만남의 부자연스러움이 결코 이유가 없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 일차적인 책임은 장애인 당사자들에게 있다. 스스로의 삶이기에 사회 환경적 문제를 탓하기 이전에 스스로가 보다 능동적인 자세로 부딪치고 또 넘어서야 할 것이다.
단, 국가나 사회가 의도하진 않았더라도 다수를 위한 효율성 및 생산성 제고라는 명분 아래 장애인에 대한 잘못 고착된 편견을 사회가 형성하도록 방치했다면 그것의 해결을 위한 노력은 마땅히 국가가 짊어져야 할 몫이다.
적어도 아직까지 필자의 시각에 장애인의 고용이나 사회 참여는 마치 자유연애 없이 중매결혼을 한 한국의 전통혼례를 연상케 할 때가 종종 있다. 그렇기에 혼주는 여전히 당사자가 아닌 사회적 명분이며 절박한 현실이 된다.
그렇게 전혀 다른 환경과 사회에서 살던 두 당사자가 만나 다행히 서로에 대한 낯설음을 극복하고 관심을 갖고 하나가 된다면 다행이나 우리의 현실은 그렇게 넉넉지 않은 게 사실이다. 물론 다행히 아주 이상적이고 완전한 결합을 이룰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현실은 그렇지 않으며 더군다나 결혼과 같은 도덕적 책임감을 강요할 수도 없다.
즉 결론인즉슨 아무리 교육을 통해 비슷한 지식과 사고를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가졌더라도 서로를 사전에 미리 만나고 또 이해할 수 있는 자유연애의 과정과 그러한 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이며 그것이 전제될 때 파혼과 같은 장애인 이직률도 줄어들고 거시적 관점의 장애인 고용 확대에도 기여하게 되리라는 생각이다.
교육의 과정에는 각각 통합교육과 특성화교육의 장단점이 있겠으나 가급적 만남의 기회가 많이 주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특히 중증장애인의 경우에는 사회화 과정을 위한 인턴십(Internship)의 활성화가 보다 많아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인턴십 과정을 통해 신체적 장애로 인해 상대적으로 경험적 지식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보완하고 사회와의 충분한 자유연애를 통해 당사자 스스로가 자신의 미래를 고민하고 함께할 수 있는 대상을 찾도록 하여 장차 그 직업 선택의 폭을 확장해나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너무도 이상적이고 당연한 이야기이며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장애인의 고용 및 인식개선 문제에 대한 정책은 양적 성과에 매달리지 않고 시스템의 변화도 물론 중요하나 그보다 보다 근본적인 환경적 변화에 집중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결국 장애인에 대한 그 모든 인식개선 노력은 궁극적으로 장애인의 사회 참여를 통해 새로운 인적 자원을 개발하는 생산적 노력이자 모두가 함께 하는 사회를 꿈꾸는 이상이며, 고용은 그 중 가장 능동적 실천수단 중 하나이다.
그렇기에 그 두 가지를 결코 분리해서 볼 수 없으며 또한 무엇이 더 중함을 논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그 중 어느 하나만 소홀해도 그 결과는 허명무실(虛名無實)해지기 십상이다.
그렇기에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일상에서의 만남도 그리고 장애인 고용 현장에서도 이제는 물리적 결합이 아닌 화학적 결합을 이루어 나가야 할 때이며, 비록 더디더라도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장애’라는 빈 그릇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하나의 가치를 담아 채워나가는 노력을 해나가야 우리 모두가 바라는 이상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간절한 바람이자 소망이다.
기사일:2013.4.15
앞서 공단은 장애인고용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 장애인고용촉진 강조기간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해 매년 전 국민을 대상으로 에세이, 사진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공모를 실시해왔다.
올해로 22회를 맞은 작품현상공모전의 주제는 ‘장애인고용’으로 에세이, 인쇄매체디자인, 사진, 환경 및 실내디자인 등 네 분야 입상작 총 27점이 결정됐다. 본지는 환경 및 실내디자인을 제외한 입상작을 분야별로 소개할 예정이다. 여섯번째는 에세이 분야 장려 작품.
장애인고용, ‘함께’에서 ‘하나’로
송영희(남, 42세, 서울 서대문)
“경(卿)은 들으라!” 임금이 신하를 보고 말한다.
신하는 황급히 임금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지를 살피어 “네, 전하!”라고 화답한다. 이번에는 임금이 다른 신하를 보며 부른다.
“경(卿은 들으라!” 하지만 이번엔 아무 신하도 대답을 않는다.
임금의 부름에 계속해서 아무 대답이 없자 신하들은 임금의 용안을 살피며 안절부절 하기 시작한다. 임금은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신하들을 응시하다 이내 무언가를 알아차렸다는 듯 다시금 환한 표정으로 한 신하를 바라보며 부른다.
“소경(小卿)은 들으라!” 그러자 그제서야 한 신하가 선명한 목소리로 “네, 전하!”라고 대답한다.
시각장애인을 칭하는 말 중 '소경(小卿)‘이란 말은 조선시대에 한 임금이 신하를 부를 때 “경(卿)은..”이라고 부르면 신하 중 눈이 먼 신하가 자신을 부를는지 알지 못해 임금이 친히 구분하여 ‘소경’이라고 부르는 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시각장애인을 칭하는 호칭 중 봉사(奉仕), 참봉(參奉), 등도 조선시대 각각 종8품과 종9품에 해당하는 관직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과거 우리가 장애인을 칭하는 호칭들을 살펴보면 당시 장애인의 사회적 지위를 칭하거나 장애인 당사자에 대한 이해와 배려에서 기인한 것들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장애인을 칭하는 호칭 중에는 ‘장애인’ ‘장애자’ ‘장애우’ 등 여러 호칭들이 혼용되고 있으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하여 부르는 호칭 또한 ‘장애인과 비장애인’, ‘장애인과 일반인’과 ‘장애인과 정상인’ 등등이 같이 쓰여지고 있어 당사자는 물론 이를 사용하는 사람들마저 혼란스러워 아예 말을 얼버무리거나 심지어는 사용을 꺼리는 경우까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맞는 말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필자는 그 모두가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다. 아니 그 호칭을 두고 무엇이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논쟁이라는 판단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안에 어떠한 감정과 의미를 담아 사용하고 또 받아들이고 있느냐는 것이며, 그것은 어떠한 호칭을 사용한다 하더라 도 우리 사회의 다양한 사회적 배경과 그 개개인의 감정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사랑이란 단어 한 마디에도 아가페(agape), 스토르게(storge), 에로스(eros), 플라토닉(platonic), 필레오(filevw),루두스(rudis) 등 다양한 의미들이 함의되어 있고 또 우리는 그 ‘사랑’이란 단어 안에 각자가 가진 스스로의 감정을 담아 사용하며 또한 그것을 듣는 이 또한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어떠한 감정으로 말했는지를 이해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우리말에는 존칭이나 존댓말이 따로 있고 또 오랜 시간 그러한 언어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특히나 사람을 칭하는 호칭에 예민하며 자신의 감정을 전하는 데에 신중을 기하는 습관이 있다. 그러나 그 내면에 담긴 정서나 감정은 잠시의 예(禮)는 갖출 수 있을지언정 어떠한 단어나 표현으로도 감출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서두가 너무 길었는지 모르겠으나 이러한 사소한 호칭에서의 혼선과 어색함이, 또 장애인을 바라보는 잘못 내재화된 선입견이 아직까지도 장애인과 비장애인 간 아주 멀지도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어중간한 거리를 계속해서 형성하여 더 이상 다가서지 못하도록 하는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혹자는 이러한 거리감 따윈 별 거 아니라 치부해버릴 수도 있겠으나 이런 사소한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의 어색함이 서로를 대하는 불편함으로, 또 그러한 불편함이 감정적으로 고착되어 나중에는 아예 회피해버리는 상황에까지도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누군가를 만나고 안 만나고의 문제를 넘어 장애인들의 사회화 과정에서 고용, 참여, 기회 등 여러 방면에서 그로 인한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하게 되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장애인 수는 선천적 이유나 후천적 질병 그리고 산업재해 및 고령화에 따른 노인 인구 증가 등으로 날로 늘어나고 있으며 그에 따른 사회문제가 종종 심각한 화두로 이슈화 되고 있는 상황에서 ‘장애인 고용’은 그야 말로 장애인 당사자의 삶의 질은 물론 사회적 자원의 효율성 재고라는 측면에서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가장 이상적 해법임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장애인 고용을 더욱 적극적으로 창출하고 개발해나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바로 이러한 질문에서 필자는 우리가 다시 원론적인 고민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장애인 고용을 활성화 하기 위해 사용자는 물론 장애인 당사자에 대한 다양하고 지속적인 지원정책도 분명 꼭 필요하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그에 앞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장애인과 비장애인 간 어색하고 불필요한 소통의 장벽을 허물기 위한 노력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생각보다 그리 거창하지도 복잡하지도 않은 일이며 지금까지의 여러 교육이나 현장에서의 활동들을 통해 이미 해오던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노력들이 지속되지 않거나 일회적 행사로 그 진정성 없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지금이라도 그러한 형식적 틀을 벗어나 사회 환경적 변화에 따른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할 것이다.
장애인의 문제가 단순히 ‘복지’라는 관점에서 벗어나 ‘고용’이라는 생산적 관점으로 변화되었음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나 또한 아주 도전적인 변화이기도 하다.
이러한 변화를 보다 능동적으로 받아들이고 또 우리 사회에 잘 안착시키기 위해서는 장애인 당사자는 물론 이를 지켜보는 사회 전체적 시각의 변화가 절실히 필요하다.
하지만 장애인의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차는 아직까지도 너무도 뚜렷하다. 이러한 관점은 어느 일방이 앞서 가서도 또 과거에 머물러 있어도 전체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에 큰 걸림돌이 된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장애인의 고용 및 인식 문제를 바라보는 네 가지의 관점이 존재한다. 그 중 두 가지는 장애인 당사자의 시각으로 복지라는 영역에서 안주하며 국가의 책임을 강조하는 시각과 이제는 제도적 인큐베이터에서 벗어나 스스로 당당해지고자 하는 시각이다.
그리고 나머지 두 가지는 이러한 장애인 문제를 바라보는 일반 사회적 시각으로 장애인의 고용 및 사회 참여를 그들이 가진 생산적 요소를 발굴하고 또 함께 하고자 하는 진정한 동반자적 시각이며, 마지막 하나는 장애인들의 그 모든 사회 활동에 대해 실리보다는 형식적 명분을 더욱 중시하는 시각 또한 존재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각기 다른 입장에 서서 우리는 하나의 대상, 즉 장애인에 대하여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거나 혹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더라도 조금은 다른 의미들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장애인의 사회화 과정에서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과제는 그러한 각기 다른 관점을 통합하고 비록 시간이 더디더라도 서로 간 특별한 이벤트를 통해서가 아닌 일상에서의 자연스러운 만남의 기회가 보다 많이 주어져야 할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장애인의 사회 참여와 고용 창출은 해를 거듭하며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고 적어도 그것의 필요를 논하는 데에는 아무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또한 그간의 여러 제도적 노력과 사회 전반적인 의식의 성장을 통해 장애인 고용률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으나 그것의 이면에 감추어진 높은 이직률을 보면 그간의 성장을 자랑하기엔 아직 이르다는 생각이다.
고용 현장과 일반적 사회현상은 차치하고, 장애인 근로자의 높은 이직률은 앞서 언급한 바 대로 서로 간 관점의 차이에 따른 사회 현장에서의 만남의 부자연스러움이 결코 이유가 없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 일차적인 책임은 장애인 당사자들에게 있다. 스스로의 삶이기에 사회 환경적 문제를 탓하기 이전에 스스로가 보다 능동적인 자세로 부딪치고 또 넘어서야 할 것이다.
단, 국가나 사회가 의도하진 않았더라도 다수를 위한 효율성 및 생산성 제고라는 명분 아래 장애인에 대한 잘못 고착된 편견을 사회가 형성하도록 방치했다면 그것의 해결을 위한 노력은 마땅히 국가가 짊어져야 할 몫이다.
적어도 아직까지 필자의 시각에 장애인의 고용이나 사회 참여는 마치 자유연애 없이 중매결혼을 한 한국의 전통혼례를 연상케 할 때가 종종 있다. 그렇기에 혼주는 여전히 당사자가 아닌 사회적 명분이며 절박한 현실이 된다.
그렇게 전혀 다른 환경과 사회에서 살던 두 당사자가 만나 다행히 서로에 대한 낯설음을 극복하고 관심을 갖고 하나가 된다면 다행이나 우리의 현실은 그렇게 넉넉지 않은 게 사실이다. 물론 다행히 아주 이상적이고 완전한 결합을 이룰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현실은 그렇지 않으며 더군다나 결혼과 같은 도덕적 책임감을 강요할 수도 없다.
즉 결론인즉슨 아무리 교육을 통해 비슷한 지식과 사고를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가졌더라도 서로를 사전에 미리 만나고 또 이해할 수 있는 자유연애의 과정과 그러한 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이며 그것이 전제될 때 파혼과 같은 장애인 이직률도 줄어들고 거시적 관점의 장애인 고용 확대에도 기여하게 되리라는 생각이다.
교육의 과정에는 각각 통합교육과 특성화교육의 장단점이 있겠으나 가급적 만남의 기회가 많이 주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특히 중증장애인의 경우에는 사회화 과정을 위한 인턴십(Internship)의 활성화가 보다 많아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인턴십 과정을 통해 신체적 장애로 인해 상대적으로 경험적 지식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보완하고 사회와의 충분한 자유연애를 통해 당사자 스스로가 자신의 미래를 고민하고 함께할 수 있는 대상을 찾도록 하여 장차 그 직업 선택의 폭을 확장해나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너무도 이상적이고 당연한 이야기이며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장애인의 고용 및 인식개선 문제에 대한 정책은 양적 성과에 매달리지 않고 시스템의 변화도 물론 중요하나 그보다 보다 근본적인 환경적 변화에 집중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결국 장애인에 대한 그 모든 인식개선 노력은 궁극적으로 장애인의 사회 참여를 통해 새로운 인적 자원을 개발하는 생산적 노력이자 모두가 함께 하는 사회를 꿈꾸는 이상이며, 고용은 그 중 가장 능동적 실천수단 중 하나이다.
그렇기에 그 두 가지를 결코 분리해서 볼 수 없으며 또한 무엇이 더 중함을 논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그 중 어느 하나만 소홀해도 그 결과는 허명무실(虛名無實)해지기 십상이다.
그렇기에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일상에서의 만남도 그리고 장애인 고용 현장에서도 이제는 물리적 결합이 아닌 화학적 결합을 이루어 나가야 할 때이며, 비록 더디더라도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장애’라는 빈 그릇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하나의 가치를 담아 채워나가는 노력을 해나가야 우리 모두가 바라는 이상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간절한 바람이자 소망이다.
기사일:2013.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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